2전시실

수책거적도(守柵拒敵圖)

수책거적도
  • 조선 후기
  • 41.2 × 32.0
  • 고려대학교박물관 / 복제

    이순신이 1587년(선조 20) 함경도 조산보 만호 겸 녹둔도 둔전관으로 있을 때 기습 침입한 여진족을 쫓아 포로로 붙잡힌 농민과 병사를 구했던 사건을 기록한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까지 함경도 지방에서 무공을 세운 인물 8명의 행적을 담은 『북관유적도첩 北關遺蹟圖帖』의 한 장면이다.

발포만호에서 파면된 5개월 후 훈련원 봉사로 복직한 이순신은 그 후 함경병사 병방권관을 거쳐 건원보 권관으로 다시 북방 최일선으로 갔다.
건원보에서 이순신은 여진족 추장 울지내를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 때에 부친상을 당하여 아산으로 내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을 치르고 나서 사복시주부로 복직한 이순신은 발령받은 지 불과 16일 만에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로 임명되어 다시 북방 전선으로 나가게 되었다.

조산보는 두만강 유역으로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는 지금의 함경북도 선봉군에 있는 곳이다.
녹둔도는 조산보 너머 두만강을 끼고 있는 섬이었다.
조선 세종조에 6진을 개척하면서 이 섬에다 토성과 목책을 쌓았고, 세조 때에 녹둔도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선조대에 와서 이 섬에 군사용 둔전을 조성하였다.
농민들은 배를 타고 이 섬에 들어와 농사를 지었다.
이순신은 곧 녹둔도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 녹둔도의 농사는 여진족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여진족의 습격에 대비하여 함경병사 이일에게 군사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는데, 결국 1587년(선조 20) 가을에 여진족의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 기습에서 조선군 10여 명이 죽고 160명의 인명과 15필의 말이 잡혀갔다.
이순신은 이운룡과 함께 추격하여 사로잡힌 우리 군사 60여 명을 도로 되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왼쪽 다리에 화살을 맞기도 하였다.
북병사 이일은 이 사건을 경흥부사 이경록과 조산만호 이순신의 잘못이라 하여 잡아 가두고 조정에 벌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고 하여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종군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고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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