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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충사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다

    현충사는 1706년 숙종 임금 때 건립되어 이순신 장군을 향한 추모의 향불이 끊이지 않았으나,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어 그 자취가 사라져 버리고 유허비만 남게 되었다, 그후 일제 강점기때 ‘충무공묘소 위토 경매 사건’이 발단이 되어 전국민이 거국적으로 모은 성금으로 1932년 현충사를 중건(重建)하게 되었다. 이후 1967년에 박정희 대통령의 성역화 지시로 순한국식 콘크리트 구조로 된 현재의 현충사로 세워졌고, 기존의 건물은 서편 참배로 옆으로 이전하여 ‘구 현충사’라 부른다.

    현충사에 모셔져 있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월전 장우성 화백의 1953년도 작품으로 1973년에 국가 표준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영정을 그릴 때 친분이 있었던 유성룡(柳成龍)이 쓴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용모에 관한 기록을 참고하였다. 내용은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中有膽氣 忘身殉國 乃其素所蓄積也” (순신의 사람된 품이 말과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죽었으니 이는 본래부터 수양해 온 소치라 하겠다) 이다.

    건물 안쪽 벽에는 이순신 장군의 일생 중에 특기할 만한 사건 10가지를 묘사한 십경도(十景圖)라는 그림이 있다. 서울대 미대 정창섭, 문학진 교수의 작품이고 1970년 한국기자협회에서 기증하였다. 현충사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을 기념하여 매년 4월 28일 정부주관으로 제전을 올리고 있다.

  • 정려
    정려는 충신이나 효자, 열녀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여 그들이 살던 마을 입구에 걸어두는 건물로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사표(師表)로 삼아 그 정신을 고취하고 본받도록 세우는 것이다

    현충사 정려에는 이충무공 장군과 공의조카 이완, 사대손 이홍무, 오대손 이봉상 등 네분의 충신과 팔대손 이제빈, 한분의 효자 편액이 걸려있다. 원래 정려는 동남향으로 정위치에 있었으나 현충사 성역화시 참배객들의 편의를 위하여 서향으로 방향을 바꾸어 해체·복원하였다.

  • 고택
    고택은 이순신 장군이 사시던 옛집이다

    이순신 장군은 21살 때 결혼하였는데 부인은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方震)의 무남독녀였다. 따라서 처가집이 자연스럽게 이순신 장군의 본가가 되었다. 현재 건물은 전통적인 한식 목조건물로서 안채만이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대대로 종손이 살아오다가 1969년 현충사 성역화사업 당시에 경내의 존엄성을 고려하여 이주하였다.고택 뒤편에는 가묘(家廟)가 있는데 이곳에는 현 종손의 4대조까지의 신위(神位)와 함께 이순신 장군의 신위가 중앙에 모셔져 있다.

  • 활터
    활터는 옛집 옆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있는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활을 쏘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활터를 둘러싼  방화산의 능선은 말을 타시던 곳으로 치마장(馳馬場)이라 불린다.

    과녁판은 활터에서 남방으로 145m떨어진 곳에 있으며 이순신 장군이 연습하던 당시에는 200m의 거리였고, 임금님이 북쪽에 계시기 때문에 항상 남쪽을 향해 활쏘기 연습을 하였다고 한다. 매년 4월28일 이순신 장군 탄신일에는 전국 시·도 대항 궁도대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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