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시실

기복수직교서(起復授職敎書)

기복수직교서
  • 1597년 (선조 30)
  • 89 × 193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7월 16일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패하여 위기에 처하자 선조가 상중(喪中)의 몸으로 백의종군 하고 있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면서 내린 교서이다.

기복(起復)이란 기복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 것이 관례인데 나라의 필요에 의하여 상제의 몸으로 상복을 벗고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을 말한다.

조선 시대는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겼고 그에 따라 부모에 대한 예의 종류가 많이 발달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상례(喪禮)는 매우 엄격하여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묘소 아래에서 상주가 3년[정확하게는 24개월, 대상(大喪)을 치를 때까지] 동안 시묘(侍墓) 살이를 하는 풍습까지 있었다.
그래서 양반 사대부는 부모의 상을 당하면 그 기간 동안 벼슬에서 물러나 상례에 전념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나라에서도 부모상을 당한 관료에게는 상을 치르는 기간 동안 벼슬을 휴직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은 서른아홉 되던 해에 부친상을 당해 3년을 휴관한 후 다시 복직한 적이 있었다.
이 교서에는 선조 임금의 난감한 처지가 잘 드러난다.
또 선조는 임금으로서는 참 하기 힘든 고백을 한다. “공로와 업적이 임진년의 큰 승첩이 있은 후부터 크게 떨쳐 변방의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어 온” 이순신을 “직책을 갈고, 죄를 이고 백의종군하도록” 하였던 것은 “사람의 모책(謀策)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며 자신의 실책을 어렵게 고백한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의 패전의 욕됨을 만나게 되었다”면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거듭 이순신을 갈고 원균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게 한 자신의 정책이 과오였음을 토로하고 있다.
임금이 신하를 임명하는 글에서 스스로 자신의 정책상의 실책과 과오를 토로하는 보기 드문 이 교서는 그만큼 전황이 다급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국가가 의지하며 믿고 맡길 수 있는 바가 오직 수군뿐”인데 “삼도의 대군이 한 차례의 싸움에서 모두 다 없어졌으니” 그 창망한 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이제 일본군이 군사를 몰아 서해 바다로 치고 올라오면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결국 선조는 이순신을 “상복을 입은 채로 기용하고, 백의 가운데서 뽑아내어 다시 옛날같이 충청전라경상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니 제발 “충의(忠義)의 마음을 더욱 굳건히 하여 나라 구제해주기를 바라는 임금의 소망을 이루어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을 뿐이다.

이 교서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 소식이 전해지고 그 대책회의를 연 다음 날인 7월 23일 작성되어 연안 답사길에 나선 이순신에게는 열흘 후 진주의 수곡에서 전달되었다.
이순신은 교서를 받기 전날 밤 “임금의 명령을 받을 징조가 있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8월 3일 이른 아침에 선전관 양호가 이 교서와 유서를 가지고 와서 이순신은 숙배를 한 뒤에 이를 받았다는 서장을 써서 봉해 올리고 곧 다시 길을 떠났다.
이제 통제사로서 삼도 수군을 수습하여 적의 공격을 막아야 할 막중한 임무가 다시 주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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