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시실

충무공 장검(忠武公 長劍)

충무공 장검
보물
  • 1594년 (선조 27)
  • 길이 196.8 / 197.2

    이순신이 1594년 4월 한산도 진중(陣中)에 있을 때 만든 칼이다. 전장에서 실제로 쓴 것이 아니라 곁에 두고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칼날에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친필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고, 칼자루 속에 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戊生(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떨고 三尺誓天 山河動色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길이가 무려 197.5센티미터로 어른 키보다 훨씬 큰 두 자루 칼이다.

칼자루 속 슴베에 “갑오년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들었다(甲午四月日造太貴連李戊生)“이 새겨져 있어 이 칼을 만든 이와 시기를 알 수 있다.
1594년 4월은 전란이 일어난 지 2년이 되는 때였다.
이때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교섭이 진행되고 있어 전쟁은 소강상태에 있었지만 전염병과 기근으로 진중에서는 죽어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일본군과 큰 전투 없이 지루한 대치 상태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때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적과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다시 각성하고자 이 두 자루 칼에 그 뜻을 새긴 것이리라.

칼자루는 길이가 60센티미터에 달하며 두께도 직경이 5센티미터에 가까울 만큼 길고 크다.
나무로 만들었으며 붉은 옻칠[朱漆]을 한 어피로 덮고 그 위에 다시 검은 옻칠[黑漆]을 한 가죽끈을 X자 모양으로 묶었다.
칼자루의 끝, 즉 칼머리에 덧댄 뒷매기는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조금 좁아드는 원통형이다.
위쪽에는 빗금무늬를 은입사하였고, 옆면에는 모란을 상감하였다.
칼자루와 코등이가 만나는 앞매기는 칼자루를 보강하고 슴베가 칼자루에 단단히 고정되도록 해주는 부분인데 기하학적 무늬를 상감하였다.
칼자루와 칼날 사이에 끼워서 손을 보호하도록 만든 코등이는 국화 문양이 투각되어 있는데 두 개의 구멍이 있다.
칼날의 길이는 137.5센티미터이며 전체적으로 휘임각이 큰 편이며 단면은 육각형이다.
칼등 쪽에 칼날 중간까지 하나는 폭이 넓고 다른 하나는 좁은 골[혈조血槽]이 위아래로 나란히 하나씩 파져 있다. 혈조 아래에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라는 구절이 대구로 새겨져 황동으로 입사되어 있다.
칼집은 나무로 만들고 그 위에 붉은 기운이 감도는 어피를 씌운 다음 다시 검은 옻칠을 하였다.
칼집끝은 모란을 은상감한 무쇠로 감쌌으며 칼집입에도 기하학 문양을 은입사하였다.
칼집을 단단하게 하기 위해 가운데에 두 개의 가락지를 끼웠다.
두 가락지를 걸쳐 칼집 윗몸에 길게 철을 덧씌우고 아래 위 두 가락지 위에 칼집고리를 달고 칼집끈을 묶었다.
칼집끈은 무거운 장검을 매달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들었는데 두터운 소가죽 위에 삼베를 대고 다시 사슴가죽을 씌운 것이다.

2미터에 달하는 길이나 4킬로그램이 넘는 무게로 보아서 실제 사용한 칼로 보기는 어렵다.
더욱이 두 자루를 만들어 댓구를 이루는 검명을 새긴 것으로 보아 통제사의 권위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한 의장용이거나 마음을 가다듬기 위하여 방에 걸어두고 보았던 것일 가능성이 높다.
날카로운 칼에서 나오는 본래의 엄정함에 더해 이순신의 마음이 아로새겨진 검명이 겹쳐 이 두 자루 장검은 묘한 울림으로 오늘도 그 앞에 많은 사람의 발길을 붙들어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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