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시실

태촌선생문집(泰村先生文集)

태촌선생문집
  • 조선 후기
  • 20.5 × 31.0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복제

    조선 중기 문신·학자인 고상안(高尙顔:1553~1623)의 시문집이다. 고상안은 임진왜란 중 삼가현감을 지내며 갑오년(1594년)에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무과시험을 실시할 때 참사관으로 참가하여 13일을 함께 지낸 적이 있다.

이순신의 외모에 대한 또 하나의 기록은 태촌 고상안(1553~1623)이 자신의 문집에 남긴 글이다.

고상안은 임진왜란 중 삼가현감을 지내고 있었는데, 1594년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진중 무과시험을 실시할 때 참시관으로 참가하였다.
마침 이순신과 과거 급제 동기이기도 했던 그는 무과 시험을 치르는 13일 동안 이순신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그 인상을 기록하고 있다.

“통제사는 과거 시험에 같은 해 합격한 이로, 며칠을 같이 지냈는데 그 말의 논리와 지혜로움은 과연 난리를 평정할 만한 재주였으나 얼굴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못하고 상(相)도 입술이 뒤집혀서 마음속으로 여기기를 ‘복장은 아니구나’하였는데 불행하게도 나국의 명이 있었고, 다시 쓰이기는 하였으나 겨우 1년이 지나서 유탄을 맞고 고종(考終)하지 못하였으니 한탄스러움을 어찌 금하랴?” 이 글은 앞서 류성룡의 묘사와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어쩌면 이순신이 전란 중 치열한 전투와 부상, 기근과 질병으로 수천의 병사와 백성이 죽어나가는 험한 세월을 이겨오는 과정에서 얻은 훈장과 같은 흔적이었을 것이다.

또 당시 공의 일기를 보면 이때 공은 열흘 이상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아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한 인간의 일생에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보다 그가 일생에서 이룩한 행적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상안은 이 기록에서 당시 경상우수사였던 원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구사직의 인물평도 함께 하면서, 이순신에 대해서는 “그러나 죽던 날까지 군기를 기획하니 죽은 통제사가 살아 있는 행장行長(고니시 유키나가)을 도망치게 함으로써 다소나마 국치를 씻고 그 공적은 태상(太常)에 명류(名流)로 만고에 기록되니 죽어서도 죽지 아니한 것이다.
어찌 원수사, 이수사의 무리와 같이 놓고 이야기하겠는가”라고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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