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일생

십경도는 : 충무공 이순신 장군 앵애에서 중요한 10장면을 묘사한 그림을 말하며 종류는 유화이다. 서울대학교 정찹섭, 문학진교수의 작품으로 1970년 한국신문협회에서 기증하여 현충사 본전 안 벽면에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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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일생
  • 소년시절
    충무공 이순신의 소년 시절 : 이순신은 1545년 4월 28일(음력 3월 8일) 서울 건천동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이순신 사후 조카 이분이 쓴 '행록' 에는 '어려서 놀 때도 늘 전쟁놀이를 하는데 모든 아이들은 반드시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을 따라 유학을 배웠는데 재주가 있어 성공할 만도 했으나 매양 붓을 던지고 군인이 되고 싶어 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로 보아 이순신은 어렸을 적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용감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순신의 어린시절 전쟁놀이를 하며 동무들을 이끄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 청년시절 : 이순신은 혼인 후, 장인 방진의 영향으로 무관이 되어 나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한다. 28세가 되던 해(1572년) 무과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왼쪽 다리가 골절된다. 이때 이순신은 옆에 있던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다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끝가지 시험에 응했다. 이그림은 그때 상황을 그린 것이다.
  • 여진족을 무찌름
    여진족을 무찌름 함경도에서 초급 무관시절 : 이순신은 43세 때(1587년) 함경도 조산보 만호와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고 있었다. 이때 여진족들이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 이순신은 이 여진족들을 토벌하면서 우리 포로들을 구출 하는 등 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병사 이일의 허위보고로 백의종군의 억울한 처분을 받았다.
  • 거북선 건조
    거북선 건조 전라좌수사시절 : 이순신은 임진왜란 발발 14개월 전인 1591년 2월 전라좌수사로 부임하게 된다. 공은 장차 일본군이 쳐들어 올 것을 예견하고 군사 훈련과 시설보수 등을 강화하여 전쟁에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이때 이순신은 여러 해전 승리의 주역이였던 거북선을 완성하였다. 이 그림은 그떄의 상황을 그린 것으로 이순신의 유비무환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 부산해전
    부산해전 연전연승 : 임진왜한 발발 후 만반의 준비를 갖춘 덕에 이순신은 여러 해전에서 연승을 거둔다. 이후 1592년 9월 1일 부산 절영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르는데 이를 '부산해전' 이라 한다. 부산해전은 다른 해전과는 달리 적의 본진으로 직접 들어가 대규모 함대를 포격하는 공세적인 작전이었다. 이순신 스스로도 장수와 군졸들의 공로에서 부산해전이 가장 큰 싸움이었다고 징계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매우 아끼던 부하 장수인 녹도만호 정운을 잃는 슬픔을 겪고 만다.
  • 한산도생활
    한산도생활 삼도통제사 시절 : 이 그림은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한산도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나라를 걱정하며 진중 일기를 쓰시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순신이 이전한 한산도는 곧 삼도수군통제영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순신은 일본군과의 싸움에 대비하여 수군확보, 둔전경작, 무과실시 등을 통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이순신이 남긴 일기와 장계, 그리고 임금이 내린 여러 건의 유서에 잘 나타나 있다.
  • 충무공의 효성
    충무공의 효성 : 이순신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 전란 중에도 여수 본영에서 가까운 곳에 모시어 어머니의 안후를 살피곤 했었다. 이 그림은 당시에 어머님을 뵙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내용이 많이 적혀있다. 더욱이 2차 백의종군 당시에는 어머님의 죽음을 접하고도 상을 제대로 치루지 못한 채 전쟁터로 나아가며 마음 아팧사는 심정이 곳곳에 나타나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운 마음을 들게 한다.
  • 죄인의 몸
    죄인의 몸 : 이 그림은 억울하게 죄인의 몸이 되어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되던 도중에 백성들이 길을 막고 통곡하는 장면을 그린것이다. 1597년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오라고 명령한다. 그죄는 조정을 기망하고, 적을 치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조의 노여움이 심하여 도체찰사 이원익과 서애 유성룡조차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 우의정 정탁이 이순신을 구명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선조의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도 이순신이 이룬 그간의 공적과 이번 사태의 원인이 된 조정의 출격명령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명확하게 해명하면서 구명을 호소하였다. 이는 다행히도 선조의 마음을 움직였고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도원수 권을 막하에서 백의종군을 하도록 명을 받게된다.
  • 명량대첩
    통제사 재임명 명량대첩 :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나와 백의종군 하던 당시 칠천량에서 원균은 일본군에 대패하고 맡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한다. 그러나 조선수군은 겨우 12척의 배가 남아있었고, 군사들을 아직 칠천향해전의 패배에서 받은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서해안 길목 진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은 부하 장병들을 불러 모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말로 독려하고 전투에서는 스스로 맨 앞에 나가 싸웠다. 13척의 배로 130척이 넘는 적선을 무찌른 이 전투가 그 유명한 울돌목해전 곧 명량해전이다. 일본군은 명량해전의 패배로 서해바다를 통해 북진하려는 작전을 포기해야 했고 조선은 정유재란의 승기를 잡게 된다.
  • 노량해전
    충구공의 최후 노량해전 :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이 곧 철수 할 것이라는 정보가 전해지면서 전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일본군측은 철군준비에 들어갔으며, 명나라는 자신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이를 묵인하는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이를 묵과할 수 없었다. 결국 이순신의 끊임없는 설득에 명나라 해군제독 진린은 마음을 돌리게 되었고 일본군의 해로를 봉쇄하기로 한다. 이에 1598년 11월 18일 조명연합수군은 노량해협으로 오는 일본군 함대를 맞아 전투를 벌였으니 이 전투가 노량해전이다. 치열한 접전 끝에 조명연합군은 일본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순신은 적의 총탄을 맞아 전사하고 만다. 하늘의 큰 별이 바다에 떨어졌으니 이때는 이순신이 54세 되던 해였다. 그리고 드디어 이 해전을 마지막으로 7여 년간의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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